조조의 오환 정벌은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고생스러웠고 식량과 물이 없어서 많은 병사가 희생되었으며 가장 사랑하는 책사 곽가마저 잃은 힘든 과업이었다. 그러나 오환 정벌로 청주지역이 완전히 평정되어 하북 지역이 완전히 장악되었다. 공융은 조조가 황제를 직접 위협하는 세력으로 완전히 자리 잡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 했는지 허도를 중심으로 천 리 이내에는 제후를 봉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건의했고, 이 일은 조조가 공융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된 듯하다. 공융이 55세인 208년 1월, 조조가 오환 정벌에서 돌아오자마자 형
공융이 46세가 되던 199년, 조조 제거 시도가 발각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10년 어린 나이에 동탁에 의해 황제가 된 헌제는 어느덧 혈기 왕성한 20대 중반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동탁과 이각-곽사, 조조에게 줄줄이 시달리며 비렁뱅이가 되었었고 꼭두각시 취급받아왔으니 얼마나 속에서 불이 치밀어 올랐을지 짐작하고 남을 일이다. 그런 헌제가 조조를 제거하여 황실을 바로잡으라는 혈서 밀지를 옥대에 숨겨 동귀인의 아버지인 동승에게 내린다. 동승은 뜻을 같이하는 유비, 왕자복, 충집, 오석, 오자단 등을 모아 거사를 논의하려 했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공융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서 평천하(平天下)를 노릴 기회를 버리고 황제의 부름에 응하여 6년 전 동탁에 의해 떠났던 중앙정치무대로 복귀한다. 군(君)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신(臣)의 위치로 가서 충의(忠義)의 가치관을 실천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한나라 황제인 헌제는 포로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197년 동탁에 의해 황제가 된 후 이각과 곽사의 난에 의해 성 밖 비렁뱅이가 되었다가 조조의 천하 영웅에 앞서는 명분을 위한 전략으로 구출되어 허도로 이끌려 온 헌제는 얼굴마담이었다. 조조는 스스로 사공의 자리에 올라
공융의 발해국 북해상 시기는 그의 인생 중기에 해당한다. 권력자 동탁에게 밉보인 결과로 맞은 위기로 시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생에서 때로 위기란 기회의 또 다른 얼굴일 때가 많다. 공융이 38살되던 191년, 북해상으로 임지에 온 공융은 초토화된 북해의 백성을 수습한다. 또 군사를 모집하고 곳곳으로 격문을 보내 세력을 집결하는 등 자체 방어 능력을 강화한다. 그 결과 황건적의 식량 약탈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20만 황건적을 다른 지역으로 후퇴시키는 전과를 거둔다. 재차 침입한 황건적 역시 격파해 성읍을 수복한다. 여기에 유가적 덕
아마도 공융은 20세 전후에 관직에 나간 것 같다. 당시 사도(사마, 사공과 함께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최고의 관직. 주로 민정 부분을 담당했으며, 실질적으로 승상 대우를 받았음) 양사가 추천해서 사도부 소속 관리로 재직하는 동안 환관과 그 친족들의 비리를 많이 적발해서 보고했다고 한다. 그런데 상관인 상서가 환관들의 권력을 두려워해서 결재해 주지 않고 도리어 공융에게 면박을 주었다. 한나라 말 환관의 득세 상황 꼬라지가 훤히 보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비리를 정연히 진술했다니 공융은 제법 꼬장꼬장하고 타협하지 않는
얼마 전 지인이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에서 올려 본 밤하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후두두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그 별 무리를 보며 호흡이 멎는 황홀함과 신비로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사하라 사막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시골이나 바닷가에서 밤하늘을 올려 보면 별이 저리도 많다니, 저리도 가까이 있다니 하고 절로 경탄하게 된다.철이 들며 깨달은 것은 나보다 못난 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읽으면서 세상에 잘난 사람과 뛰어난 사람이 하늘의 별처럼 넘친다는 생각을 했다. 춘추전국시대와 삼국시대에 대한 글을 읽으면
주윤발 유역비 주연의 은 손에 잡은 권력의 크기만큼 긴장과 고민, 갈등이 컸던 조조를 일반적인 시선에서 벗어나서 보는 영화다. 한나라에 대한 역적이 아니라 충신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실제의 역사적 사실에다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백을 상상으로 메꾸고 이은 팩션(Faction = Fact + Fiction) 영화인 것이다. 영화란 것이 원래 설명보다는 보여줌으로써 느끼게 하는 힘이 큰 매체여서 당시의 맥락 내용을 미리 아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큰 자극을 주는 의미 있는 영
후계자 경쟁은 이기는 것보다 의사결정자의 기준 충족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경쟁에 이기고도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생겨난다. 즉 의사결정권자의 기준과 의도를 얼마나 잘 파악하고 충족하는가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삼국지를 보면 경쟁의 시작은 조비가 앞서 있었다. 장자 승계의 원칙에서 유리했고, 25살부터 오관 중랑장을 역임하며 경험도 많이 쌓았다. 순욱을 비롯한 많은 대신이 지지했다. 특히 조식의 처가 어른이었던 최염도 조비를 지지했다. 최염이 충고를 하자 조비가 고개를 숙이면서 그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여 사냥을 그만두
208년에 삼공을 폐하고 스스로 승상이 된 조조는 조정의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손권 토벌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5년 후, 신하들이 구석 아부를 한다.구석을 내린다는 것은 황제가 자리를 양위하겠다는 의미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대신들이 황제에게 황제의 자리를 조조에게 양위하라는 압박을 한 것이다. 조조에게 황제가 되라는 최고의 아부를 한 셈이다. 그것을 반대하던 순욱은 조조로부터 빈 도시락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순욱이 죽고 1년 후, 조조는 다시 스스로 위공의 자리에 오르고 실질적으로는 황제 이상의 힘을 가진 존재
앞 글에서 조조가 한나라의 사공에서 승상으로 승진한 것을 이야기했다. 나라를 장악한 세력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제 조조에게는 두 방향의 힘이 가해지기 시작할 것이다. 첫 번째는 기대어 덕을 보려는 집단의 힘이다. 그 집단은 조조에게 왕이 되고 황제가 되라고 부추길 것이다. 조조에게 구석을 내리라고 황제를 압박하는 조정 대신들도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 힘은 조조는 한 왕실을 무너뜨리는 역적이라고 생각하고 제거하려는 경쟁자와 반대파의 힘이다. 원소, 원술, 유표 등 외부의 경쟁자뿐만 아니라 황제를 에워싼 황실 중심주의 신하가 아직도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삼국지와 상상의 허구를 구성한 무협지는 분명히 다르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영웅담, 뛰어난 사람 중심으로 읽으면 무협지에 가까워진다. 역사의 맥락과 흐름, 변화를 함께 살피면서 읽으면 재미 이상의 무엇이 보인다. 양수는 재사로 유명한 사람이다. 보통 자기자랑하다가 성질 고약한 조조에게 걸려서 '계륵'이라는 일화를 남기고 죽은 재수 없는 천재로 많이 기억한다. 만일 그의 재기 발랄함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로 그를 파악한다면 무협지 읽기로 접근한 것이다. 당시 위진남북조라는 시대상황과 권력자 조조의 움직임,
몇 해 전 아들이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는 날이었다. 수료식장 주변은 3주간의 훈련을 마친 아이의 모습이 궁금한 부모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두 비슷한 마음이라 말 붙이기가 쉬웠다. 가까이 계신 분께 "우리 때보다 훈련이 많이 쉬워졌는데도 약해진 아이들이라 견디기 힘들어하네요"라며 말을 걸었다. 그때 그분의 대답이 아직도 선명하다. "훈련이 아무리 쉬워졌어도 힘들게 느껴지는 건 우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고통의 크기는 가해진 힘의 크기가 아니라 받은 느낌의 총량이다. 현재 밀레니얼들이 느끼는 막막함, 애를 써도 반복되는 실망
당시 조조가 황제를 모셔서 천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천하 세력의 선두주자는 원소였다. 그리고 경쟁자 유비는 서주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유표는 형주에서 제법 세력을 구축해 안정되어가고 있었다.조조는 조만간 원소와 승부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조조의 앞에는 원소가 있고 뒤에는 유비와 유표가 있는 모양이라 마음이 걸렸다. 원소와 한 판 벌리려니 뒤에 있는 유비와 유표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미리 후환을 제거하고 싶은데, 겨울철이라 군사를 이동하기에 적당하지 않아 난감했다. 그러던 참인데 최근 합
삼국지 속 예형은 뛰어난 재주와 독설로 일약 화제로 떠오른 인물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허도의 실권자 조조에게도 알려졌다. 조조도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한 번 보려고 했을 것이다. 인재에 대한 욕심이 유난히 컸던 조조였으니 그럴만하다. 예형을 불렀다. 그런데 공식적인 발탁의 과정은 아니고 사적인 면접 기회 정도였던 것 같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예형이 거절한다. 조조를 역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였는지 아니면 공식적 발탁이 아니라 사적으로 한번 보자고 하는 것이라서 거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예형이 거절하면서 내세운 이유
우리 주변에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기인들이 참으로 많다. 그런데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진다. 오래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뛰어남을 넘는 무언가가 있다. 그들은 어떤 의미 또는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역사가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예형(禰衡)은 삼국지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 아니다. 도리어 사소한 인물에 가깝다. 그러나 매우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다. 북 연주를 잘했고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했으며 특히 살인적인 독설가로서 고작 26년을 살았을 뿐인데 2
지난 가을의 일이다. 한참 추수 중에 '후다닥!' 소리가 나더니 고라니가 튀어나왔다. 새끼로 보이는 작은 녀석도 이삭 사이에서 나왔다. 콤바인 기계가 멈추어 서고 논둑의 농부 둘이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어미는 허둥대며 콤바인 쪽으로 덤벼들려다가 농부가 가로막자 몸을 돌려 논둑 넘어 개천 수풀로 몸을 던졌다. 새끼도 뒤따라 사라졌다.여기는 '구만리 들'의 남쪽 한 귀퉁이다. 위쪽에 야트막한 산, 아래쪽엔 4차선 산업도로, 좌우엔 2차선 지방도로가 둘러싸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2년 전에 허리께에 새 포장도로가 놓
잘생겼다고 다 영화배우로 성공하지 못하며 노래 잘한다고 가수로 대박 나지 않는다. 똑똑하다고 다 출세하지 못하고 실력 있다고 다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지만 삼국지에는 인물이 넘친다. 그 중 아쉬운 인물을 꼽자면 여포가 있다. 그는 당시 최고의 무사였다. 삼국지연의의 편저자인 나관중이 '신이 전쟁을 위해 특별히 만든 불사신'이라고 묘사했을 정도다.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탐을 냈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3대 미녀 중 한 사람과 극적인 연애를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삼국지 전체에서 로맨틱 핸
문화강좌 신청 방법과 절차가 달라졌다며, 홈페이지에서 직접 신청하라는 공지가 떴다. 담당자가 때맞춰 잘 알렸으나 쉽지 않았다. 나만 아니었다. ‘강좌를 열 번 넘게 쳤으나 없다’, ‘어떻게 하느냐’고 여러 사람이 물었다. 어느 분이 접속 링크를 만들어 대화창에 올렸으나 이번에는 수강료를 먼저 입금했는데 등록이 되었느냐는 문의가 이어졌다. 담당자의 수고와 번거로움, ‘절차가 어렵게 개악되었다’라는 불만을 지켜보며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최근 고속도로 휴게소가 크게 달라지는데, 그중 하나가 음식을 주문하는 방법이다. 어느 날 음식 주
제4유형 – 힘들게 하고,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사실 이 유형의 사람이 직장생활 어려움의 대부분을 안겨준다. 이 유형에는 참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있다.첫째, 자기 말만 하고 나를 무시하거나 가르치려 하는 사람이다. 자기만 옳다고 하거나, 자기가 더 잘 안다고 우긴다. 가끔은 내 영역까지 넘어와서 이것저것 간섭하고 바로잡으려고도 한다. 그리고 제 할 말 다 하면 가 버린다. 그의 잘난 척 보다 내 말의 기회를 잃은 것에 더 화가 난다.둘째, 일을 떠넘기는 얌체다. 함께 일을 해야 하는데 자기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중이니 먼
관우의 실패가 성공의 절정기에 일어났다는 것은 매우 교훈적이다. 당시 삼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조조의 위나라는 그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르느라 재정 손실이 커져 있고 조직 내의 문제도 산적해 있었다. 손권의 오나라도 지방 토호 세력의 영향으로 응집된 국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촉한이 가장 안정되고 유리한 상황이었고, 관우도 과감하게 조조의 영토를 공격해서 큰 전과를 여러 번 올리기도 했다. 국가의 팽창이 시작되던 때였다. 그런데 선봉장인 관우가 무너지면서 교두보인 형주를 잃자 상황은 반전되었다. 촉의 짧은 우위 상황